한국사 편력 10

태종의 치세

제 2차 왕자의 난과 태종 왕자의 난을 통해 차남 이방과가 두 번째 조선의 왕에 올랐다. 이성계의 눈 밖에 나 권력에서 제외되었던 이방원이 권력의 핵심이 되었다. 하지만, 형제들 모두 권력에 만족한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많은 아들들이 모두 행복할만한 결과를 얻기는 불가능했다. 분명 권력에서 배제된 형제들이 있었다. 먼저 불만을 표출한 것은 사남 이방간이었다. 그럴 만한 이유는 분명 있었다. 그는 조선 건국에 큰 공헌을 하지 못했다. 아버지를 따라 무공을 세운 이방과와 가족을 구한 이방원은 뚜렷한 업적이 있었지만, 이방간은 업적이 없었다. 자연스럽게 권력에서 제외되었다. 또,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건 왕자들만이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조전 절제사 박포가 있었다. 그는 이방원의 최측근 신하였다. 정도전 생..

한국사 편력 2020.10.11

요동 정벌과 왕자의 난

정도전의 요동 정벌 명의 초대 황제 주원장은 조선과의 군신 관계 와 정도전의 명 방문을 요구했다. 주원장의 성격이 변덕이 심한 인물이라 왜 정도전의 명 방문을 고집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추측하건대, 그가 명실상부한 조선의 2인자였고, 조선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이기에 한번 만나 대화를 하고 싶었는 듯 하다. 문제는 조선 입장에선 정도전을 보낼 수 없었다. 건국한지 3년도 안된 신생 국가에서 정도전이 할 일은 산더미 만큼 쌓였다. 조정의 실권을 가진 인물이었기에 그가 없으면 처리되지 않는 일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반 정도전파는 그를 압박했다. 대표적인 인물은 권근과 하륜이었다. 정도전 대신 명나라로 넘어가 표전문 사건을 해결한 권근이 있었다. 정도전은 권근에 맞서 그를 탄핵하려 했지만, 외교 문제..

한국사 편력 2020.09.20

조선의 건국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 왕요가 이성계로 부터 왕으로 지목된 이유는 친인척 관계에 있는 왕씨였기 때문이다. 정창부원군 왕요는 고려 20대왕 신종의 7대손이었다. 공양왕의 동생인 정양군 왕우가 이성계의 7남인 이방번의 장인이었고, 그의 아버지 왕균이 공민왕에게 백작위를 받았다는 점이 그가 왕이 된 주요 이유였다. 이성계가 아니었다면 왕과는 전혀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아버지의 노력으로 지방에서 많은 부를 축적해서 살아가고 있는 평범한 왕족이었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은 그를 갑작스럽게 왕위에 앉혔다. 그것도 아무 실권이 없는 왕으로. 평범한 삶에 비극이 찾아온 것이다. 더 큰 비극은 그가 생각보다 유능했다는 점이다. 왕좌에 오른 그는 자신이 고려 사직의 마지막 왕으로 기록되기 싫어했다. 이미 조정의 실권이..

한국사 편력 2020.09.15

위화도 회군

무진피화, 이인임의 축출 이인임의 절대 권력에 한가지 변수가 생기기 시작한다. 바로 황산대첩의 영웅 이성계가 개경으로 복귀한것이다. 이인임에게 억압받은 사대부들은 유교에 대해 긍정적인 이성계의 복귀를 열렬히 환영했다. 이성계는 개경으로 돌아오기 전 전장에서 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의 이름은 바로 정도전이었다. 유배 생활중이었던 정도전은 정부의 눈에 피해 평소 존경하던 이성계를 찾아가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평소 유교와 경전에 대해 크게 관심을 가진 이성계는 유교적 학식이 뛰어난 정도전을 보고 그가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한다. 이성계는 자신보다 한참 어린 정도전을 삼봉 선생이라고 부르며 대우했다. 이성계가 개경으로 돌아오자 그는 우왕에게 건의해 정도전이 지방에 유배가 있을 인물이 아니라며, ..

한국사 편력 2020.09.08

무너져가는 고려

공민왕의 죽음 그토록 사랑했던 노국대장공주와 총애했던 승려 신돈이 모두 죽자 공민왕은 정치에 대한 흥미를 잃었다. 이 와중에 노국대장공주의 영전을 성대하게 세우려고 무리한 비용과 용역을 동원하자 백성들은 등을 돌리기 시작한다. 게다가 여진족과 왜구의 침입이 지속되고 있어 백성들의 삶은 더욱 힘들어졌다. 신하들은 왕에게 올바른 정치를 요구했지만, 공민왕은 이를 무시하고 궁궐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는 누군가 자신을 시해 할 것이라는 망상에 빠져, 흥왕사의 변 당시 자신을 지켜준 환관들만 주위에 두었다. 신하들은 왕을 보기가 어려워졌다. 후사 문제도 그의 발목을 잡았다. 출생이 불확실한 반야의 소생인 왕우만이 유일한 후손이었다. 반야는 이전에 언급한대로 신돈이 데려온 노비였다. 그의 출신 때문에 백성들..

한국사 편력 2020.08.23

공민왕의 개혁 정치

고려 31대 군주, 공민왕 1259년 고려는 원나라와 강화 조약을 맺음으로서 여몽전쟁이 끝나고, 원 간섭기가 시작된다. 원나라는 고려를 강압적으로 수탈했다. 그들은 고려의 군권과 외교권을 박탈하고, 젊은 청년과 아가씨들을 조공으로 요구했다. 일부는 같은 고려인임에도 불구하고 원나라에 붙어 고려 백성들의 피를 빨아먹는 부원배가 되었다. 14세기에 들어 원나라의 고려 수탈을 더욱 심해졌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고려에 왜구들이 끊임없이 출몰해 백성들을 약탈했다. 몽골의 탄압을 받던 중국의 일부 한족들은 붉은 수건을 부르고, 원나라를 공격했다. 이들을 홍건적이라 불렀는데, 먹을 것이 부족하던 이들은 압록강을 넘어 고려를 침입했다. 국가의 위기를 헤쳐 나갈 명군이 필요했다. 그러나 위기를 짊어진 국왕은 한국사 희대..

한국사 편력 2020.08.15

한반도의 고대 국가

한사군의 설치와 폐지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부를 차지했던 위만 조선이 멸망하고, 한나라에서 세운 4개의 군이 그 자리로 들어서게 된다. 흉노와의 전쟁에 집중하고 있던 한무제는 한반도 지역에 중앙 정부 출신의 관리를 파견하기엔 부담스러웠다. 그는 요동 출신의 장수들을 적극 활용했다. 그리고 고조선에서 시행했던 8조법을 기반으로 발전된 사회에 맞게 법 조항을 더욱 늘린 60조법을 시행했다. 이런 점으로 볼때 한나라는 흉노와의 전쟁을 위해 한반도 사람들에겐 회유 정책을 펼쳤다. 게다가 낙랑군의 경우 토착민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해 세력을 가장 크게 키워나갔다. 평양 정백동 고분군에 위치한 낙랑군 유적은 한반도 남부의 세형 동검과 삼한의 철기 유물도 같이 나온다. 이는 낙랑군이 삼한의 국가들과도 좋은 관계를 ..

한국사 편력 2020.08.09

진국 이야기

진국 이야기 기원전 한반도에 고조선만 존재했던건 아니다. 조선이 가장 강력한 국가였던건 맞지만, 이외에도 정말 많은 소국들이 존재했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국가인 진국에 대해 알아보자. 중국 삼국시대의 역사를 담은 진수의 정사 삼국지를 보면 한반도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그 중 다음과 같은 문장이 존재한다. 진한은 옛날의 진국(辰國)이다. 그리고 한서에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 한에는 세갈래의 국가가 있는데, 첫번째는 마한, 두번째는 진한, 세번째는 변진이라고 하고…. 총 78국이며…. 모두 옛 진국에 속한다. 또한, 한서에 한나라는 진국과 교역을 하고 있었는데 이를 위만 조선이 방해를 했다는 문구도 존재한다. 이 기록들을 살펴볼때 한반도 남부엔 삼한 (마한, 진한, 변한)이 있었고 이들..

한국사 편력 2020.08.02

위만조선의 등장과 멸망

위만 조선의 등장 기원전 222년, 중국 진나라의 왕 정이 중국 전토를 통일하고 시황제에 오른다. 진 시황제의 천하통일은 단군 조선에도 영향을 미쳤다. 전국 7웅 중 하나였던 연나라가 멸망하게 되면서 조선은 직접적으로 진나라와 국경을 마주하게 된다. 요하에 기반을 둔 연나라는 황하 문명과 조선 사이의 완충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연나라는 멸망했지만 여전히 잔존세력이 존재했다. 혼란이 채 수습 되기도 전에 진시황이 급사하게 되고 한고제 유방이 다시 천하를 통일한다. 한나라는 넓은 영토를 직접 다스리기 어려웠으므로, 각 지방에 제후와 왕위를 나눠주었다. 한고제 유방은 자신의 오랜 동향 친구인 노관을 연왕으로 책봉했다. 한고제는 진시황제의 실패를 두 눈으로 직접 목격했다. 그는 한 사람에게 너무 큰 권력이 ..

한국사 편력 2020.07.26

한민족 최초의 국가, 단군 조선

삼국 유사에 기록된 단군 신화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그 중 하나가 우리의 뿌리를 알고 싶어서 일 것이다. 하지만, 한 나라나 민족의 뿌리를 찾는 일은 쉽지 않다. 워낙 오래전의 일이라 글자도 존재하지 않았고 그 시대에 직접 기록한 문서도 거의 없다. 유적이나 벽화로 시대상을 분석하고 이루어 짐작 할 뿐이다. 고고학적 증거를 활용해 역사를 분석하기도 하는데, 이것을 실증주의 사학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방법 역시 쉽지 않다. 애초에 역사학이 쉬웠다면 동북공정과 같은 역사 분쟁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한민족의 정확한 뿌리를 알기란 쉽지 않다. 그래도 그나마 많은 역사학자들이 실제 역사로 봐도 괜찮겠다고 합의한 사서가 있다. 바로 '삼국유사'이다. 이 삼국유사에는 한국인..

한국사 편력 2020.0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