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편력

무너져가는 고려

gyulee0220 2020. 8. 23. 02:42



공민왕의 죽음


  그토록 사랑했던 노국대장공주와 총애했던 승려 신돈이 모두 죽자 공민왕은 정치에 대한 흥미를 잃었다. 이 와중에 노국대장공주의 영전을 성대하게 세우려고 무리한 비용과 용역을 동원하자 백성들은 등을 돌리기 시작한다. 게다가 여진족과 왜구의 침입이 지속되고 있어 백성들의 삶은 더욱 힘들어졌다. 신하들은 왕에게 올바른 정치를 요구했지만, 공민왕은 이를 무시하고 궁궐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는 누군가 자신을 시해 할 것이라는 망상에 빠져, 흥왕사의 변 당시 자신을 지켜준 환관들만 주위에 두었다. 신하들은 왕을 보기가 어려워졌다.

  후사 문제도 그의 발목을 잡았다. 출생이 불확실한 반야의 소생인 왕우만이 유일한 후손이었다. 반야는 이전에 언급한대로 신돈이 데려온 노비였다. 그의 출신 때문에 백성들 사이에선 왕우가 공민왕이 아닌 신돈의 자식일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가 후사를 낳지 못한 이유는 노국대장공주 외에 다른 왕비들에게 큰 관심이 없었다. 확실한 후계자가 없으면 왕 역시 궁지에 몰리게 된다. 그나마 본인이 후사에 대한 의지가 있으면 그가 죽더라도 어린 왕을 세우고 섭정을 하면 될 텐데, 의지가 없으니 문제였다.


  더욱 더 충격적인 것은 공민왕이 궁궐에서 자제위, 후궁들과 함께 문란한 행위를 이어갔다. 자제위는 공민왕이 손수 뽑은 미소년 집단으로 왕의 최측근 호위 무사였다. 환관과 더불어 왕을 가까이에서 모실 수 있었던 유일한 집단이었다. 공민왕은 자제위를 뽑아 놓고 자신들의 후궁을 범하라고 지시 했을 정도로 해서는 안될 짓을 자행했다. 이를 지켜보던 왕비 중 한명인 정비 안씨는 공민왕이 미쳤다고 생각해 자살을 시도했다.

  결국 이런 위태로운 행위를 이어가다 기어이 사고를 친다. 자제위 중 한명이었던 홍륜이 공민왕의 세번째 비인 익비 한씨를 임신 시키고 만것이다. 이 사실을 공민왕과 홍륜 그리고 환관 최만생이 알고 있었다. 홍륜이 한씨를 임신시킨것을 최만생이 눈치채고 왕에게 가서 이 사실을 알렸다. 이 사실을 알게된 공민왕은 홍륜을 살해하고, 이 사실을 알고있는 너 역시도 같이 죽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최만생은 역으로 홍륜과 모의하여 공민왕을 시해하기로 한다. 자고있는 틈을 타 홍륜과 함께 공민왕을 난도질 한다. 고려의 재건을 꿈꾸고, 120년의 원간섭기를 끝낸 고려의 마지막 개혁 군주 공민왕은 결국 환관의 손에 처참히 죽고 만다. 홍륜과 최만생은 공민왕을 죽이고 스스로 누군가에게 공민왕이 시해되었다고 떠벌렸다. 이 사실을 들은 공민왕의 오른팔이자 조정의 실세 이인임은 즉시 병사들을 이끌고 궁궐을 포위하고, 홍륜과 최만생을 붙잡는다. 오랜 고문 끝에 자신들에 왕을 시해했다는 자백을 받아내게 되고, 결국 둘은 처형당하게 된다. 이인임은 그렇게 궁궐을 완벽히 장악하고, 새로운 권력의 중심으로 떠오르게 된다.


  너무 허무한 공민왕의 죽음 때문인지 여러 의혹이 남아있다. 과연 자제위에 의해 시해된 것이 맞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공민왕 시해사건이 담겨있는 문헌은 조선 왕조에서 작성한 고려사이다. 이 책에선 조선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고려에 대해 최대한 깎아 내린다. 일례로 우왕과 창왕이 공민왕의 후손이 아니라는 ‘우창비왕설’이다. 그래서 고려사에는 우왕이 신돈의 자식이라는 점을 들어 그의 이름을 왕우가 아닌 신우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공민왕은 후사를 낳지 못하는 문제에서 착안해 그가 궁궐에서 문란행위를 하다 살해되었다고 고려사에 기록했다는 가설이다.

  그리고 이인임이 너무 쉽게 권력을 장악했다. 중국 명사의 조선열전에 있는 기록 중 이인임이 공민왕을 시해 했다는 문구가 있다. 이를 통해 신돈 사후 권력의 중심으로 떠오른 그가 공민왕을 죽이고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홍륜과 최만생을 이용해 차도살인을 계획했다는 가설도 존재한다.

  일부에서는 자제위가 공민왕의 개혁 정치의 일부라고 해석한다. 공민왕은 자제위를 선발할 때 주로 권문세족의 자제들을 선발하였다. 그가 일부러 자식을 인질로 잡아두고 왕권을 강화 시키기 위해 만든 조직이라고 보는 역사학자도 있다. 공민왕이 워낙 유능한 정치가의 모습을 도였고 동시에 실망감도 커서 현대까지도 그를 다양한 시각으로 분석하고 있다. 어찌 되었든 공민왕의 죽음으로 고려 왕조는 사실상 종말되었고, 이제 사형 선고만을 기다리는 시한부 왕국이 되었다는 점은 분명했다.


  공민왕은 성과와 한계 둘다 두드러진 왕이었다. 몇가지 조건만 충족되면 명군이 될 수 있었다. 그 필요조건 역할을 하던 두 사람은 노국대장공주와 신돈이었다. 누군가 옆에서 자신을 응원해 줄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자신의 뜻을 수행할 완벽한 수행자가 있다면 그는 훌륭한 설계자 역할을 수행했다. 노국대장공주의 지원과 신돈의 행동을 통해 권문세족을 혁파하고, 원 간섭기를 끝냈으며 백성들에게 토지와 식량을 나눠줬다. 문제는 이 필요 조건이 무너지면 속절없이 의욕을 잃었다. 그리고 그는 예술적 역량이 뛰어났다. 문제는 이 역량이  군주로서 크게 필요하지 않다. 결국 무리한 영전 사업을 하거나 자제위 사건과 같은 전형적인 미치광이 적인 국왕의 모습도 보여준다. 그리고 그의 의심 많은 성격은 매번 발목을 잡았다. 완벽한 수행자가 필요한 사람이 그 수행자를 계속 의심하니 개혁이 제대로 이뤄 질 수 없었다. 그래도 공민왕 덕분에 고려의 수명이 이어져가고, 신진사대부를 등용해 조선 건국 세력을 만들어 냈다는 성과는 인정할 만하다. 아마 이성계가 조선 건국 이후에도 종묘에 공민왕의 사당을 지은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 였다.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


  이전에도 설명했듯이 고려를 병들게 한 원인 중 하나는 홍건적과 왜구의 끊임없는 침입이었다. 중국 한족 백련교도를 중심으로 구성된 이들은 붉은 두건을 두르고 다녔다고 해서 홍건적이라 불렸고, 훗날 명나라를 세우는 중심 세력이 된다. 공민왕 8년 요동에 있던 홍건적들이 3,000여명의 병사를 이끌고 고려를 약탈한 것을 시작으로, 모거경이 4만명의 병력으로 압록강을 건너 의주룰 공략했다. 이들은 무려 70여일동안 고려의 서북면을 공략했다. 조정은 급히 이방실과 안우를 파견하여 가까스로 이들을 막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홍건적은 다시 압록강을 건넜다. 이번에는 무려 20만명의 병력이 고려를 침공했다. 반성, 사류, 관선생, 주원수가 이끄는 홍건적은 삽시간에 개경을 함락시켰다. 공민왕은 안동까지 도망가 간신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홍건적은 개경에 수개월간 주둔하면서 재물을 뺏고 부녀자를 겁탈했다. 공민왕은 다시 안우, 이방실, 이성계를 개경에 보내 간신히 수복했다. 이 중 이성계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단 2천명의 병력을 이끌고 성에 올라 적을 격파했고, 이를 본 고려군의 사기가 크게 오른 것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결국 홍건적 장수 관선생과 사류를 붙잡았고, 치열한 전투 때문에 성 내에는 수많은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고 한다. 개경에서 패주하는 홍건적을 압록강 밖으로 쫓아내어 간신히 홍건적의 난이 진압되었다.

  홍건적의 난은 여러가지로 고려에 악영향을 미쳤다. 우선, 개경 이북 지방에 대한 지배권을 크게 상실했다. 원 간섭기에도 발생한 문제와 동일한데, 고려가 중앙집권을 표방한 왕국이라 하더라도 조선이나 현대처럼 명확한 집권 체제가 구축된건 아니었다. 북방의 세력들은 언제라도 자신들이 유리한 방향으로 동맹 관계를 구축했다. 몽골이 고려를 침공했을 때, 많은 북방 지배세력들이 원나라에 굴복한 것도 이와 같은 이유다. 공민왕 집권 이후 반원정책을 고수하며, 북방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회복 했지만 홍건적의 침입으로 다시 지배권을 상실했다. 홍건적에 투항한 세력도 있었고, 고려측에 남아 싸우다 힘을 잃은 경우도 있었다. 게다가 고려는 홍건적과의 전쟁을 위해 원나라의 힘을 빌릴 수 밖에 없었고, 이 시기에 공민왕의 반원 정책에 제동이 걸렸다. 


  홍건적 뿐만 아니라 왜구도 고려를 병들게 했다. 왜구는 일본의 해적을 뜻하는데, 고려 말의 왜구는 이전의 해적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일본은 가마쿠라 막부가 끝나고 남북조시대가 시작되면서, 중앙 막부는 지배력을 완전히 잃게 된다. 대혼란 속에서 수많은 왜구들이 일어났고 막부가 있던 쿄토 마저 왜구들의 침략을 받는다. 그리고 이들은 고려까지 손을 뻗게된다. 1350년 충정왕 시기부터 왜구는 고려에 처음 출몰했다. 초기 왜구들은 식량 약탈을 목적으로 쳐들어 왔지만 점차 계획적으로 바뀌어갔다. 공민왕 즉위 이전부터 왜구는 고려 조정의 골칫거리로 떠올랐다. 공민왕은 왕에 오르자 마자 전국에 격문을 뿌리며 왜구에 대한 경고를 시작했다. 물론 전혀 소용 없었다. 왜구는 이전보다 더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이들은 남해안에만 머무르지 않고, 황해와 동해 할 것 없이 모두 약탈해갔다. 1355년 왜구는 전라도의 조운선 2백척을 약탈하는 등 대담하게 움직였다. 즉위 내내 왜구에 시달리던 공민왕은 대장군 최영을 전라도로 파견해 왜구를 소탕할 것을 지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359년 왜구들은 예성강까지 올라와 개경 인근의 도시들 마저 약탈했다. 위에선 홍건적이 아래에선 왜구가 침입하며 고려는 중앙 정부의 지배력은 약해졌다. 지방 세력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1360년대에 이르러 왜구의 침입은 절정에 달한다. 목포, 고성, 울산, 양주(현 양산)등은 이미 왜구의 손에 떨어져 그들의 본거지 역할을 했다. 1363년 무려 213척의 왜구들은 교동 수안현 (현 김포시)에 나타났다. 단일 규모만 보았을 땐 왠만한 국가의 수군 병력과 맞먹는 어마어마한 대군이었다. 같은 해에 북방 세력 나하추와 기황후의 명을 받은 최유가 북쪽 국경을 동시에 침입해 고려는 대 혼란을 겪는다. 북방은 이성계가 가까스로 막아내고 있었고, 남쪽의 왜구는 대장군 최영 덕분에 막을 수 있었다. 이렇게 전 국민이 힘을 합쳐도 막아낼까 말까 한 상황임에도, 내부에서 칼부림을 하는 자들도 속출했다. 전라도 도순어사 김횡은 왜구를 막으라는 명령을 받고 전장으로 내려가 군량미를 착복하고 조운선 구축 비용을 자기 재산으로 빼돌리고 과부를 겁탈하는 미친 행동을 이어갔다. 심지어 김횡은 조정에 뇌물을 줘 승전 보고를 올릴 수 있었고, 공민왕은 그에게 공로를 치하한다고 술까지 대접했다. 고려가 얼마나 병든 상태였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1374년 합포 전투에서 고려군은 또다시 대패한다. 왜구 350척이 합포로 진격해 고려군 5,000여명을 사살한다. 합포 전투 당시 지휘권을 맡은 장수가 바로 김횡이었다. 제정신이 아닌 지휘관이 지휘를 하니 전쟁이 제대로 수행이 될리 없었다. 공민왕도 이번엔 그의 무능함을 눈치채고 곧바로 부하를 보내 그를 죽였다. 그리고, 각 도의 김횡의 처형에 대한 글을 보냈고, 제대로 왜구를 막지 못하는 자들은 모두 김횡과 같이 처형당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공민왕은 수군을 전국에 수군을 양성하고 명나라로부터 화약 원조를 요청하며 왜구를 막는데 힘을 쏟는다.


  하지만, 같은 해 9월 공민왕이 시해당하고 우왕이 즉위한다. 유능한 왕의 사망은 국가의 위기의식을 불러왔다. 대장군 최영 역시 그랬다. 최영은 어린 우왕 앞에 서서 왜구를 막기 위해 군사를 빌려달라고 요청했다. 우왕은 최영의 워낙 고령이라 그의 출정을 만류했지만, 최영의 의지는 확고했다. 최영은 양광도도순문사 최공철, 강영 등과 함께 홍산으로 향한다. 최영은 본인이 직접 선봉에 서 왜구들과 맞서 싸웠다. 수풀에 숨어있던 왜구 한명이 최영의 입술에 화살을 맞췄지만, 그는 곧바로 화살을 뽑고 병사를 죽였다. 최영의 노력 덕분에 고려군은 홍산에서 왜구를 물리칠 수 있었다. 물론 이후에도 여전히 왜구들은 한반도 전역에서 출몰하며 백성들을 괴롭혔다. 왜구들은 금주(현 서울특별시 금천구) 까지 출몰하며 서서히 개경으로 향했다.

  1380년 우왕 역시 왜구에 진절머리가 났는지 신하들 앞에서 본인이 직접 나서 왜구를 소탕하겠다고 선언했다. 물론, 부하들의 막아 직접 나서지는 못했다. 이 무렵 젊은 시절 중국으로 유학을 다녀온 최무선은 왜구를 무찌르기 위해서 화약을 연구하고 있었다. 중국의 화포기술서를 참고하고, 친한 중국 상인들을 통해 재료를 구해 화포를 완성한다. 우왕 6년 (1380년) 500여 척이 넘는 왜구 함선이 진포(현 군산)에 출물 했다. 고려 역시 이들을 막기 위해 조운선을 모았지만 겨우 100여척밖에 되지 않았다. 이 함대는 고려에 있는 모든 해군을 간신히 긁어 모아 만들어진 최후의 병력이었다. 만약 진다면 고려의 국운까지도 위협 받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하지만 고려에겐 화포가 있었다. 왜구들은 500여척의 함대를 한데 묶어 화력을 집중해 고려 수군을 격파할 심산이었다. 교전이 시작되고 교착상태로 접어들 무렵 고려군의 화포가 불을 뿜기 시작했다. 화력 집중을 위해 묶어둔 왜선은 화포를 맞고 치명상을 입었다. 배 곳곳에 불이 옮겨 붙으며 대 혼란에 빠진 것이다. 왜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화력을 집중하기 위해 묶은 함대가 오히려 집중 포화의 원인이 된다. 왜군은 대패했고 진포 해변앞에 왜구들의 시체가 산처럼 싸였고, 겨우 300여명만 살아 남아 고려군의 포로가 되었다. 최무선의 화약이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고려는 이성계를 삼도 순찰사로 임명해 왜구를 소탕할 것을 지시한다. 전쟁 베테랑이었던 이성계는 고려군의 본진인 남원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다음 날 전투에 돌입한다고 말했다. 주변에 있는 장수들은 적군이 지치기 시작했으므로 장기전으로 돌입하자고 말했지만, 이성계는 불같이 화를 내며, 나는 눈앞의 적을 두고 볼수 없다고 소리쳤다. 고려군은 곧바로 전투 태세에 돌입했다. 왜구도 곧바로 남원산성에 도착했다. 왜구의 수장 아지발도를 필두로 남원산성은 무너뜨리기 위해 기세를 올리고 있었다. 고려사에 기록에 따르면 왜구는 총 2만명이 결집했고, 고려군은 이에 10분의 1인 2천명 뿐이었다고 한다. 전면전으로는 이기기 어렵다고 생각한 이성계는 왜구의 뒤를 치기 위해 몰래 황산으로 향한다. 황산에 도착한 이성계는 소수의 병력으로 왜구를 기습했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왜구들을 당황했다. 하지만 여전히 숫자가 많은 왜구가 유리했다. 이성계는 이지란의 도움으로, 다리에 화살을 맞으면서도 왜구와 끝까지 싸웠다. 이성계를 막기 위해 아지발도가 나섰지만 그는 산전수전 다 겪은 이성계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성계가 화살로 아지발도의 투구를 맞추고, 다시 투구를 고쳐 쓰는 사이 부장 이지란이 화살로 아지발도를 명중 시켜 사살했다. 대장이 죽자 왜구들은 완전히 사기가 떨어졌다. 고려군은 일제히 왜구에 대한 공격을 지시했고, 1만여명이 넘는 왜구가 속수무책 당했다. 단 몇 백명의 병력으로 이룬 놀라운 성과였다. 왜구의 대대적인 고려 공세는 이성계의 맹활약으로 실패로 끝났다. 대장을 읽은 왜구는 오합지졸의 병력으로 전락하고 더 이상 고려의 위협이 되지 못한다.

  왜구의 침입은 고려에 엄청난 부담을 주었다. 고려 전력의 반 이상이 괴멸 당했고, 개경 부근까지 진격해 고려의 국운을 위협했다. 하지만, 최영과 이성계의 놀라운 활약이 이어져 고려군은 간신히 이들을 막아 낼 수 있었다. 왜구의 침입 이후 고려의 국력은 크게 약해졌고, 이성계는 국가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우왕의 폭정과 이인임


  다시 개경으로 돌아가보자. 공민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권력을 잡은건 그의 오른팔이었던 이인임이었다. 명목상으로은 공원왕후가 섭정을 맡았지만, 실권은 모두 이인임에게 있었다. 우왕의 할머니였던 공원왕후는 우왕에게 학문을 가르치고, 신하들과 자주 경연을 열어 국정 운영을 좋은 방향으로 끌고 가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실권을 잡은 이인임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의 입장에선 왕이 무능할 수록 정권을 유지하는데 유리했다. 조정에선 공원왕후와 이인임의 힘겨루기가 이어지고, 강력한 세력을 구축한 이인임이 승리하게 된다. 그는 우왕을 사치와 향락에 빠지게 하는게 목적이었다. 그리고는 스스로 왕과 다름없는 권력에 올라 섭정을 시작한다. 우왕은 그를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국정을 막장으로 끌고 갔다. 우왕 시기의 조정 세력은 크게 두 분류로 나뉘게 된다. 보수파이자 권문세족이며 권력을 잡은 이인임 일파와 공민왕 시기에 신돈을 통해 등용된 신진사대부 일파로 나뉜다. 권력을 잡은 보수파의 경우 북원과의 친교를 주장했고, 신진사대부 측은 북원과의 외교를 단절하고 명나라와 손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양 세력간 주요 쟁점은 이 부분이었다. 이인임 일파는 고려왕의 즉위를 북원에 알려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신진 사대부 입장에서는 반대했다. 이들은 북원의 사신 조차 고려에 들여서 안된다고 주장했다. 완벽한 국교 단절을 주장한 셈이다. 하지만 권력을 잡은 이인임과 보수파는 결국 우왕의 즉위를 북원에 알리기로 결정한다. 이에 대해 정도전과 정몽주를 비롯한 10명의 사대부들은 결사 반대하며 우왕에게 상소를 올린다. 하지만, 어린 우왕은 이 사건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다. 결국 이인임은 10명의 사대부를 모두 유배보내기로 결정한다. 이들은 몇년의 시간이 흐른 후 간신히 복직 할 수 있었지만, 이인임의 외교정책을 가장 강력하게 비난했던 정도전 만큼은 8여년간 복직되지 못했다. 유배 시기 정도전은 고려 전역을 떠돌아 다녔다고 전해진다.


  1380년 명덕태후(공원왕후)가 사망하고, 우왕도 이제 성인이 되어 점점 정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인임이 정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그는 부정부패도 일삼았다. 조정에 있는 사람 중 그의 집에 가 뇌물을 주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심지어 그에게 바치는 뇌물의 액수에 따라 벼슬의 등급이 결정된다는 소문까지 나돌기 시작했다. 염흥방과 같은 신진사대부들 중에서도 그의 수하로 들어가 국정 파탄을 자행했다. 당연히 같은 사대부들은 그를 맹비난했다. 심지어 고려 말 국가적인 영웅 최영 마저 이인임과 손을 잡았다. 이 둘의 관계는 꽤나 흥미롭다. 이인임의 목표는 자신의 권력 유지였다. 반대로 최영은 정치적 관심은 크게 없고 고려를 다시 세우려는 청렴결백한 참 군인이었다. 이 둘의 목표는 언뜻 보기에 대척점에 있기에 조정에 같이 있으면 매번 부딪힐것 같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오히려 둘은 서로의 목표 달성을 위해 필요한 존재로 바뀌었다.

  최영이 정치적, 경제적 욕심이 없었다는 점이 컸다. 최영의 아이러니는 본인은 정치에 관심 없었을지 모르나 이미 그는 국가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원하든 원치 않든 조정에서 큰 입김을 발휘할 수 있는 위치에 올랐다. 본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필연적으로 정치에 중심으로 이미 와있었다. 하지만 그는 정치 역량이 전혀 없었던 참군인이었다. 그는 시대의 흐름에 무지 했다.  그는 우왕의 정책에 사사건건 토를 다는 정몽주를 비롯한 신진사대부들이 그저 아니꼬왔다. 그는 사대부들이 우왕의 국정 운영을 방해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인임은 자신의 권력에 반발하는 신진사대부를 최영을 통해 찍어 누르려고 했다. 정치적 권력에 크게 관심이 없으면서 신진사대부를 누르기에 좋고 왕의 총애도 받고 있으니, 이인임에게 최영은 가장 매력적인 카드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그렇게 이인임과 최영의 묘한 공생 관계가 유지되었다. 여기에는 최영 역시 유력한 권문세족 가문이었던, 동주 최씨인 점이 한목 했다. 

  고려를 부정부패로 병들게 하는 권신 이인임, 그리고 그의 권력의 공생관계로 자리잡은 충신 최영, 정치에 크게 관심 없는 우왕, 이인임에 의해 점차 축출되고 있는 신진사대부들 그리고 여전히 전국에서 출몰하고 있는 왜구로 인해 고려는 서서히 역사 뒤편으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 이시각 지구는


1370년 : 티무르 제국 건국

1371년 : 동로마 제국 요안니스 5세, 오스만 제국의 무라드 1세에게 충성 서약

1377년 : 교황 그레고리오 11세, 로마 교황청으로 복귀하며 아비뇽 유수 종료.

1380년 : 모스크바 공국의 드미트리 돈스코이, 쿨리코보 전투에서 킵차크 칸국 격파

1382년 : 킵차크 칸국의 칸 토크타미쉬, 모스크바 점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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