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
왕요가 이성계로 부터 왕으로 지목된 이유는 친인척 관계에 있는 왕씨였기 때문이다. 정창부원군 왕요는 고려 20대왕 신종의 7대손이었다. 공양왕의 동생인 정양군 왕우가 이성계의 7남인 이방번의 장인이었고, 그의 아버지 왕균이 공민왕에게 백작위를 받았다는 점이 그가 왕이 된 주요 이유였다. 이성계가 아니었다면 왕과는 전혀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아버지의 노력으로 지방에서 많은 부를 축적해서 살아가고 있는 평범한 왕족이었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은 그를 갑작스럽게 왕위에 앉혔다. 그것도 아무 실권이 없는 왕으로. 평범한 삶에 비극이 찾아온 것이다.
더 큰 비극은 그가 생각보다 유능했다는 점이다. 왕좌에 오른 그는 자신이 고려 사직의 마지막 왕으로 기록되기 싫어했다. 이미 조정의 실권이 이미 넘어간 이 시점에서 공양왕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성계가 그를 세운 이유는 딱 하나, 보기좋은 선양을 만들기 위해서다. 이성계 역시 불법적으로 왕위를 찬탈한 사람으로 기록되기를 꺼려했다. 그가 정말로 왕권을 차지할 욕심이 있었으면 위화도 회군 시점에 당장 우왕을 끌어내고 왕의 자리에 올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왕위를 받으면 새 왕조의 정통성이 매우 떨어지고, 주변 신하들의 반발이 심할 것이다. 아름다운 선양 받으려는 이성계와 사직을 지키려는 공양왕은 서로 충돌하기 시작했다.
위화도 회군 이후 조정은 온건파 사대부와 급진파 사대부로 나뉘었다. 온건파 사대부는 현 고려체제의 유지를 주장했고, 급진파는 새로운 왕조 수립을 주장했다. 두 세력이 부딪히는 주요 쟁점은 토지개혁이었다. 1391년 (공양왕 3년) 이성계 일파의 핵심 인물인 정도전과 조준은 토지법을 제정했다. 기존 고려의 토지제도는 공음전이라고 해서, 문벌귀족들이 국가로 부터 토지에 대한 수조권을 받았다. 수조권이란, 부여 받은 토지에서 나오는 과실을 가질 수 있는 권리다. 수조권은 관리가 퇴직해도 그대로 유지되었기 때문에 고려 문벌귀족의 주요 권력으로 작용했다. 공음전으로 받은 땅에 대해서는 국가에 세금을 별도로 내지 않아도 되 폐단이 매우 컸다. 게다가 세습이 인정되어 점차 지급해야 되는 대상은 늘어나는데, 실제 토지는 그만큼 제공해주지 못하게 되었다.
과전법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우선 이전처럼 수조권은 그대로 지급하되 그 대상을 전현직 관리로 제한 했다. 세습은 더 이상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관리에게 주는 토지를 서울, 경기 지역으로 한정해 지방 지역들은 자영농들이 직접 경작하고, 국가에 세금을 낼 수 있도록 바꿨다. 전국의 토지를 개인에게 수조권을 지급하는 사전과, 국가가 소유하는 공전으로 구분했다. 사전은 과전, 군전, 공신전, 외역전으로 구분했다. 과전은 서울에 위치했고 현직 관리에게 지급했다. 군전은 지방 관리에게 5~10결의 토지를 지급했고, 외역전은 향리와 특수 직역에 종사하는 자들에게 지급했다. 공신전은 국가를 세운 공신들에게 주는 토지였다. 반대로 공전의 경우는 국가가 수조권을 직접 지는 땅으로 각도에 지급하거나 왕궁 사람들 혹은 성균관 학도들에게 지급되었다.
조준이 중심이 되어 실시된 이 과전법을 통해 고려 국가의 재정이 크게 늘었다. 이 과정에서 권문세족들이 불법으로 입수한 토지들이 모두 압수되었고, 이들의 수조권을 상실하게 되어 국가 수입이 크게 늘게 되었다. 또한, 고려 지방 호족들에게 눌려서 제대로 세금을 지급하지 못하고 있던 자영농이 크게 성장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한계도 명확했다. 고려를 병들게 한 수조권 제도는 여전히 유지되었다. 수조권 제도의 큰 문제는 조세 방식을 수조권을 소유한 사람이 마음대로 정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해당 지역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귀족들이 불합리하게 지정한 조세 제도에 복종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가장 큰 문제는 바로 공신전에 있었다. 공신은 국가를 세우거나 왕좌에 앉을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신하들에게 지급되었는데, 공신의 기준은 늘 모호했고 왕이 신하들을 자신의 세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지급하다보니 고려 시대와 같은 문제였던 토지 공급 부족 문제를 다시 겪게 되었다. 결국 조선 세조대에 이르러 과전법이 폐지되고 직전제를 세로 도입해 위 문제들은 조금씩 개선해 나갔다.
원래 정도전과 조준 일파는 계민수전을 실시하려 했다. 이는 모든 토지의 수조권을 국가 소유하고, 백성들에게 토지를 나눠주는 방식이다. 이는 공산주의에서 주장하는 기본 개념과도 일치한다. 칼 마르크스가 주장한 공산주의 개념과 비교하면 초보적이긴 하지만 기본 컨셉은 동일하다. 칼 마르크스가 19세기 사람이니 당시 기준으로 상당히 진보적인 정책이었다. 하지만 공양왕과 정몽주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혀 결국 실시하지 못하고, 이성계의 도움으로 양측은 합의점을 찾아 과전법을 시행하게 되었다.
반면에 왕위를 계속 유지하고 싶었던 공양왕은 조정 내에서 왕위 선양에 반대하는 세력들에게 눈을 돌렸다. 그에겐 최후의 수단 뿐이었다. 그들과 손을 잡고 조정의 실세 이성계를 제거하는 것이다. 그가 도움을 요청한 건 이색과 정몽주와 같은 온건파 사대부들이었다. 결국 이들은 거사를 계획한다. 이성계가 어느날 사냥을 나갔는데 낙마사고를 당하게 된다. 그가 없는 사이 공양왕과 정몽주는 이성계의 최측근 인사인 정도전과 조준을 유배보낸다. 둘은 이성계를 암살을 준비한다. 이 때 발빠르게 움직인 것은 이성계의 5남 이방원이었다. 이 소식을 듣자마자 어머니의 3년상을 치르고 있던 그는 곧바로 이성계가 있는 벽란도로 달려갔다. 그리고 아버지 이성계와 같이 개경으로 향했다. 정몽주는 이성계가 오기 전에 그를 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공양왕은 쉽게 이성계 암살 명령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공양왕 역시 이성계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고, 이성계를 죽여도 오히려 주변 세력에게 역공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다. 결국 공양왕의 우유부단함으로 거사는 수포로 돌아갔다. 이성계는 무사히 개경으로 돌아오고 사태는 종료된다.
선죽교의 비극
1392년 4월 26일, 정몽주는 이성계가 개경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그가 정말 건강한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의 집을 방문하여 이성계를 만나고자 했다. 정몽주는 이성계를 봤는데 그가 생각보다 건강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일이 잘못되었음을 직감한다. 어쩌면 그는 이성계를 본 순간 자신의 운명을 직감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할 수 없이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선죽교를 지날 무렵 이방원의 지시를 받은 조영규와 그의 무리들이 정몽주를 급습했다. 말을 타고 빨리 달아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자객이 철퇴로 정몽주의 머리를 내리찍었고, 결국 그는 선죽교에서 쓸쓸히 죽게 되었다.
이방원은 이성계의 명령 없이 독단적으로 정몽주를 살해한다. 이 소식을 들은 이성계는 화가 끝까지 났다. 이성계는 평소에도 정몽주를 굉장히 존경하고 있었다. 그는 고려 최고의 재상이자 휘청이는 고려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왜구와의 전쟁에서도 활약할 뿐 더러 스승 이색으로 부터 동방이학의 비조라는 평가를 받은 문무 모두 갖춘 최고의 인재였다. 이성계 역시 처음 그를 보고 항상 스승처럼 따랐다고 한다. 정도전 역시 정몽주의 소개로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이방원을 보고 “유학자라고 할 수 있는 너가 내 말을 어기고 불효한 짓을 저질렀으니, 내 교육이 잘못 된 터, 내가 사약을 먹고 죽고 싶은 심정이구나” 라고 말했다고 한다.
정몽주는 고려 재상 그 이상이었다. 고려 말기 신진사대부의 성장에는 그의 역할이 매우 컸다. 그는 현 고려를 구할 수 있는 학문이 성리학이라는 것을 많은 고려 백성들에게 설파했다. 성균관 시절 유생의 수를 대거 늘리고 지방에 서원과 서당을 설치해 후배 양성에도 매우 힘을 썼다. 그리고 그는 대표적인 친명파 인사였다. 홍무제 주원장은 오랫동안 고려를 압박했다. 그때마다 그의 외교술이 빛을 발했다. 주원장은 북원과 고려의 사이를 떼어놓기 위해 고려의 사신을 억류했다. 그때마다 정몽주는 직접 그에게 서신을 작성했다. 주원장 역시 평소 정몽주의 명성을 익히 잘 알고 있었기에 그의 서신을 받고 포로들을 흔쾌히 풀어주었다.
재밌는 사실은 조선 건국에 반대하다 죽은 정몽주였지만, 점차 시간이 지날 수록 조선 왕들은 그를 높게 평가했다. 조선 초기의 정몽주는 건국에 반대했다는 점으로 평가가 매우 박했다. 조선 초기에 작성된 용비어천가를 살펴보면 정몽주는 조선 건국을 막는 악마와 같이 묘사된다. 하지만, 그는 국가에 충성을 하며 자신의 지조를 지키다 죽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선의 국왕들은 정몽주와 같이 국가에 충성하기를 신하들에게 바랬고, 조선 중기서 부터는 그에 대한 평가가 올라감은 물론이고, 아예 대놓고 그를 찬양하는 글을 작성하기도 했다. 조선 왕조에 극렬히 반대했던 그가 국가가 강조하는 신하 상이 된 것이다. 훗날 정몽주의 제자였던 길재의 문하생들이 사림파가 되어 정국을 장악 한 것 역시 큰 몫을 했다. 어찌되었듯, 그는 대한민국 역사에서 충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위인으로 남게되었다.
이방원의 돌발 행동으로 조선 건국의 걸림돌이 사라졌다. 사실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이성계 본인 조차 역성혁명이 옳을지 고민했다고 한다. 고려 체제를 유지한 채 고려의 충신으로 남아 백성들을 살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도전과 이방원은 역성 혁명을 강력히 주장했다. 하지만, 정몽주 처리에 있어서는 생각이 달랐다. 정도전의 경우는 그의 오랜 친구였고 그를 죽이지 않아도 이미 대세가 넘어온 상황이었기에 그를 끝까지 설득 하거나, 안될 경우 유배를 보내는 정도로 끝내길 원했다. 반면, 이방원은 점차 시간이 흐름에 따라 아버지가 왕위를 선양받지 않을 까 초조해져갔고,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직접 손을 썻다. 정몽주 살해는 서로 비슷한 이상을 꿈꿨던 둘이 갈라지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된다.
정도전이 죽게되자 이제 더이상 이성계를 견제할 세력을 조정에 남지 않게 되었다. 거사 실패의 대가는 처참했다. 곧바로 이성계는 정도전, 남은, 조준 등 자신의 일파를 조정에 복귀시켰다. 이제 이성계의 새 왕조 건설에 동참하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훗날 사림파의 거두로 떠오르는 길재 역시 지방으로 내려가게 된다. 정도전을 비롯한 급진 사대부들은 곧바로 공양왕을 폐위 시키고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기로 결정한다. 이들은 공민왕의 4비이자 왕실의 큰 어린 정비 안씨를 찾아가 공양왕을 폐위하고 이성계에게 옥새를 넘겨준다는 조서를 쓰게 한다. 그녀는 하는 수 없이 조서를 작성하고, 이성계는 정식으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 이성계가 공양왕이 있던 수창궁 궁전에 왕좌의 자리에 앉게 되었고 이 날이 바로 1392년 7월 17일이다. 왕건이 세운 고려는 475년만에 끝내고 조선이라는 새 나라가 탄생하게 되었다. 왕에서 쫓겨난 공양왕은 강원도 원주로 유배를 떠났고, 2년 뒤인 1394년 (태조 2년) 왕씨 복원 운동 모의가 시작되자 강원도 삼척에서 처형당하면서 목숨을 읽게된다.
정도전, 조선을 만들다
조선을 만드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을 꼽으라면 정도전을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이다. 실제와 왕좌에 앉은 건 이성계였다. 재상 격이자 훗날 영의정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되는 문하시랑에 오른 것은 정도전이었다. 하지만, 조선 건국의 설계자는 정도전이었고 이를 완벽하게 이성계가 수행해 낸 것이다. 정도전이 없었다면 이성계도 없었고, 이성계가 없었다면 정도전도 없었다. 둘의 관계는 한고조와 장자방 혹은 유비와 제갈량과 같은 절대적인 신뢰관계였다. 이성계는 한참 어린 정도전을 항상 스승이라 불렀고, 정도전은 이성계를 항상 걱정하며 대업을 이루는 데 힘든점이 없는지 항상 살폈다고 한다. 이성계가 왕으로 오르고 나서 그가 노년이 되어 죽음을 앞두고 슬퍼한다는 사실을 알자 정도전은 그를 찾아가 “전하께서 최근 묏자리를 알아보고 계신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를 들으니 슬픔을 금치 못하겠다” 며 같이 술잔을 나누며 슬퍼했다고 전해진다. 게다가 정도전이 전하라는 표현을 쓰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고 전해진다. 정도전 만큼은 오랜 시간 자신의 동반자로 대업의 동지임에도 너무 격식을 차리는 모습이 싫어 단둘이 있을때는 예전처럼 불러달라고 부탁했을 정도로 둘의 사이는 막역했다.
이성계가 왕에 오르자 당연히 정도전은 국가의 2인자로 떠오른다. 늘 그렇듯 권력이 한사람에게 집중되면 이를 견제하는 세력도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게다가 정도전 성격 역시 매우 거칠어 주변 공신들과 자주 트러블이 발생했다고 한다. 애초에 정도전이 고려 말기 다른 사대부들 보다 정계 복귀가 늦은 주요 원인도 평소 이인임에게 자주 대들어 그의 눈 밖에 났기 때문이다. 이성계가 아니었다면 정계 복귀도 어려웠다. 이러한 성격은 그를 조정에서 고립 되게 만들기 딱 좋았다. 더군다나 그가 태조의 사랑 마저 듬뿍 받고 있으니 다른 대신들에겐 눈엣가시였다.
하지만 정도전은 이에 굴하지 않고, 조선 설계에 박차를 가했다. 그는 조선경국전을 편찬해 조선이라는 국가의 기틀을 닦았다. 그는 신권 중심의 국가 건설을 원했다. 이 법전은 훗날 조선의 기본 법령제도로 떠오르는 경국대전의 모체가 된다. 새로운 도읍으로 한양을 골랐다. 그는 곧바로 한양에 경복궁을 비롯한 궁궐을 지어 신 왕조의 수도를 건설한다. 경복궁이라는 이름 역시 정도전이 마든 것이다. 시경 주아편에 나오는 문구에서 착안해 지은 이름이다. 그리고 경세문감을 저술해 조선 조정에 필요한 관직 체계와 직책, 수령 등을 확립했다. 또한 구시대의 사상을 타파하기 위해 불교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그는 태조 7년 '불씨잡변'이라는 책을 통해 부처와 불교에 대해 불교 교리가 얼마나 불온전하고, 고려를 병들게 만들었는지 지적했다.
그는 1명의 정치 역량 유무에 따라 국가의 존망이 크게 변하는 전제왕권 체제를 정면으로 반박했다. 그는 지금의 행정부와 같은 역할을 하는 6조를 두어 국가 정책을 담당하게 하고, 재상이 이를 총괄하도록 했다. 재상은 임금의 행동을 감시하게 했다. 또 재상에게 권력이 너무 집중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사간원을 두어 재상이 올바른 행동을 하지 못할 때, 제어 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정도전의 이러한 사상을 기존의 유교 사상과 완전히 부합하지는 않는다. 유교 사상에서는 왕에 대한 충과 효를 가장 최우선으로 생각하는데, 그는 왕에 대한 적절한 견제가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유럽 전제 왕권을 의회를 통해서 견제하려고 했던 입헌군주제 개념과 어느정도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물론, 입헌군주제의 핵심은 국민의 투표를 통해 선출된 의회의 대표자들이 직접 법령을 만드는 사상이 라는 점이 가장 큰 차이점이긴 하다. 하지만, 이 성리학적 교리가 지배적인 14세기 말에 이 정도의 국가 체제 개념을 생각했다는 것이 굉장히 진보적인 생각이었다. 유교 교리를 타파하고 시대를 앞서간 그의 생각과 독불장군 적인 그의 성격은 반대파의 반발을 사기에 너무 좋았다.
늘 그렇듯 건국 초기 국가는 매우 불안하다. 호기롭게 조선을 건국했지만, 처리해야할 문제들이 산더미처럼 싸여있었다. 그에게 첫번째 놓인 과제는 바로 명나라와의 관계였다. 사대부들이 친명파라고는 하나, 명나라 입장에선 새 왕조가 자신들에 있어서 어떤 입장을 갖고 있는지 확실히 결정할 필요가 있었다. 조선도 신생국가 였지만, 명나라도 신생국가였기에 여전히 불안 요소가 있었다. 게다가 주원장의 끝없는 의심병도 한 몫했다. 명나라는 표면적으로는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수시로 조선 내정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보인다. 그 와중에 표전문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표전문이란 조선이 중국의 황제에게 보내는 공문서이다. 태조 4년 조선에서 파견된 유구와 정신의가 표문을 가지고 명나라 황제에게 전달했다. 태조는 표문에 명나라 황제에게 노여움을 살만한 내용이 없는지 계속 살피며 신중하게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주원장은 표문에 문제가 있다며, 유구와 정신의를 억류했다. 표문에 심기를 건드리는 내용이 있다는 이유였다. 결국 주원장은 둘은 고문했고, 표문 작성자로 정도전이 지목받게 된다. 명나라는 곧장 조선에게 정도전의 소환을 지시했다. 하지만, 조선 조정 논의 결과 실제 표문 작성자는 정총이었고, 전문은 김약항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따라서 태조는 이러한 요구를 들어 정도전을 명나라에 보낼 수 없다고 말했다. 명나라의 요구는 거셌지만, 정도전이 가야할 이유는 없어 김약항을 파견했다. 하지만 주원장은 재차 정도전을 요구했다.
결국 이 문제를 누군가를 해결해야했다. 이때, 나선 사람이 바로 권근이다. 그는 자발적으로 명나라에 가서 간신히 주원장을 설득하고 돌아왔다. 다행히도, 주원장이 권근을 좋게 봐서 사건은 일단락 되었다. 주원장이 권근을 칭찬하는 글을 조선에 보내자 반 정도전 세력이었던 권근이 조정에서 힘이 커진다. 사건이 이렇게 일단락 되었으면 참 다행이었을 텐데 그 사이 억류되어 있었던 유구와 정신의가 처형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조선 조정에서도 명나라를 좋게 보는 세력들의 힘이 약해진다. 명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했던 이성계도 이 사건을 보고 생각을 달리하게 된다. 명과 조선의 사이는 틀어졌고, 정도전은 조선의 자주성 확립과 명과의 관계를 확실히 하기 위해 요동 정벌을 계획하게 된다.
이 시각 지구는?
- 1390년: 아즈텍제국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에 마요르 신전 건설
- 1391년: 티무르, 킵차크 칸국의 토크타미시 격파
- 1392년: 일본 고코마츠 덴노에 의해 남북조시대 종료
- 1393년: 오스만 제국, 불가리아 제국의 수도 투르노보 함락
- 1394년: 베네치아 공화국, 동로마 제국의 아르고스 점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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