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이야기

인도 역사상 최고의 정복 군주, 아소카 대왕

gyulee0220 2020. 12. 13. 20:41



마우리아 왕조의 성립과 중흥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헬레니즘 제국은 인도 정복엔 실패했지만 동서양을 잇는 대제국을 세우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가 죽자 제국은 분열되었고, 인도는 이틈을 놓치지 않았다. 마우리아 제국의 창건자 찬드라굽타 마우리아는 헬레니즘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셀레우코스 제국을 공략하며 인더스 유역에 대한 확보를 성공하고 평화조약을 체결한다. 그 후 마우리아 제국에 큰 가뭄이 발생하자 그는 국왕으로써 스스로 책임을 지고 자이나교에 귀의하게 된다.

  그의 아들 빈두사라가 왕위를 물려 받고 차나키아의 도움을 통해 16개 왕국을 모두 정벌하면서 인더스 유역은 물론 중인도 지역까지 완전히 차지하게 된다. 더불어 그리스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사절단을 보내면서 우호를 다졌다. 그리스의 포도주가 상당히 맛있고, 수학이 발달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수사학 교사를 사고 싶다고 전했다. 하지만, 당시 그리스 법으로 교사의 판매는 법으로 금지되어 있기에 이를 거절하고 무화과와 포도주를 전달했다고 한다.

  

  마우리아 왕조의 발전과 동시에 많은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늘 제국 초기에는 많은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나게 된다. 특히나 가장 제국의 반발이 심했던 지역은 탁실라였다. 탁실라는 현 파키스탄에 소속되어 있는 도시로, 파키스탄과 인도 국경 근방에 위치하고 있었다. 불교문화가 상당히 발달된 도시였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정복되었다가 헬레니즘 제국 분열 이후 독립한 상태였다. 빈두사라는 탁실라를 정복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인 아소카 황자를 그 지역에 보내게 된다. 아소카는 놀라운 군사적 재능을 발휘해 손쉽게 탁실라를 공략한다. 그는 이 지역의 관리들의 횡포가 극심하다는 사실을 알고 관리를 처벌 함으로써 시민들의 지지를 얻게 되었고, 평화적으로 탁실라를 통치했다. 사람들은 아소카를 크게 지지했고, 군대도 점점 커져갔다. 이 사실이 제국에 전해지고, 아소카의 인기가 아버지 빈두사라보다 더 커지게 되었다. 이 일로 인해 빈두사라는 아소카를 크게 경계하기 시작했다. 인도 최고의 정복 군주 아소카가 인도 사람들 앞에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아소카의 성장


  아소카는 빈두라사와 신원 미상의 브라만 여성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소카의 어머니는 그의 아버지와 어릴 적에 관상을 봤는데 그녀가 낳은 아들이 석가모니 부처로 부터 전륜성왕이 될 것이라는 수기를 받았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그의 아버지는 왕에게 딸을 바치게 되었다. 하지만 궁녀들이 이 여인이 왕의 눈에 띄면 필히 왕이 우리를 거들떠 보지도 않을 것이라고 질투해 그녀를 이발사 신세로 전락시켰다. 그러다 어느날 왕이 머리를 자르다 그녀를 보게 되었고, 소원을 들어준다고 말하자 그녀는 곧바로 왕과 같이 있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이발사와 국왕이 어떻게 같이 있을 수 있냐고 말하자 그녀는 곧바로 자신의 출생과 이발사가 된 이유를 설명했다. 그제서야 국왕은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게 되었고, 둘 사이에서 아소카가 태어나게 되었다.

  빈두사라는 수많은 왕자를 거느리고 있었다. 그는 많은 왕자 중에서 누구를 후계자로 정할지 고민했다. 하루는 관상가를 불러 누가 후계자로 적합할지 물어보기로 했다. 아소카는 본래 아버지가 자신을 아끼지 않는데 굳이 가려 하지 않았으나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으로 왕의 거처로 가게 되었다. 가는 길에 대신 한명이 코끼리를 빌려주어 간신히 제 시간에 도착한다. 다른 왕자들은 모두 금은으로 된 그릇에 좋은 자리에 앉아 만찬을 먹고 있었다. 하지만, 제대로된 후원을 받지 못한 아소카는 질그릇에 담긴 타락죽을 땅에 앉아 먹고 있었다. 왕자들이 모두 모인 듯 하여 빈두사라는 관상가에게 왕위에 적합한 인물이 누군지 물어봤다. 관상가는 단번에 아소카가 왕이 될 것임을 눈치 챘으나 해를 당할까 두려워, “왕이 될 자이면 가장 좋은 것을 타고 왔고, 가장 좋은 자리에서 좋은 음식을 먹고 있을 것입니다.” 라는 애매한 답변을 하며 물러갔다. 이 말을 들은 왕자들은 서로 가장 좋은 음식을 먹었기 때문에 자신이 왕이 될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아소카는 코끼리를 타고 왔고 가장 좋은 자리인 땅과, 땅에서 나온 재료로 만든 타락죽과 질그릇으로 먹었으니 자신이 왕이 될 운명이라고 굳게 믿었다.

  기원전 273년 빈두사라 왕이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건강이 위독해졌다. 자신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한 그는 재빨리 왕자들을 호출했다. 빈두사라는 아들 중에서 수시마를 후계자로 삼고 있었다. 이전부터 그를 밀어주기 위해서 탁실라 지방이 포함된 북부 속주인 웃타라파타의 부왕으로 삼았다. 동시에 탁실라 지역에서 다시 반란이 일어났다. 이 소식을 듣고 빈두사라는 수시마에게 즉시 궁으로 돌아오라고 말하고, 아소카를 다시 파견하여 반란을 진압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는 아소카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한 계략이었다. 서부 속주 아반티파타의 부왕이었던 아소카는 곧장 궁궐로 돌아가 수시마보다 빠르게 파탈리푸트라 성에 도착했다. 아소카는 자신을 지지하는 신하들과 함께 아버지에게 찾아가 양위를 부탁했다. 빈두사라는 절대 안된다며 거절했다. 하지만 아소카에 너무 당당한 모습에 더욱 화가 났고 머지 않아 홧병으로 사망한다. 아소카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하여 국정의 권한을 모두 물려받았다. 수시마가 이 소식을 듣고 급하게 파탈리푸트라로 군대를 끌고 가지만 이미 늦었다. 수시마가 군대를 이끌고 오는 길목 곳곳에 함정을 설치해 그의 군대를 격파했다. 다른 왕자보다 항상 한발 빠른 행동이 그를 왕으로 만들었다. 



아소카의 치세


  아직 다른 왕자들이 살아 있었기 때문에 아소카는 대관식을 치를 수 없었다. 빈두사라가 사망한 기원전 273년부터 기원전 269년까지 4년에 걸쳐 무려 99명의 왕자를 모두 숙청하며 왕권을 강화했다. 모든 숙청이 완료되고 대관식을 통해 왕위에 오른 그는 마우리아 왕조의 3대 왕에 오르게 된다.

  그의 별명은 ‘카마소카’ 였는데 이는 ‘쾌락을 즐기는 사람’ 혹은 ‘야만인’을 뜻한다. 수많은 사람을 죽여가며 왕위를 차지한 그의 모습을 정확히 표현하고 있다. 그는 피부가 거칠고 외모도 못생겼다고 전해진다. 젊은 시절 자신의 외모를 욕하는 여인들에게 사형을 내릴 정도로 다혈질 적인 변모를 보였다.

  그는 왕에 오르고 행정 체계를 개편했다. 모든 국정에 직접 관여할 만큼 열정이 대단했다. 국가와 관련된 일에 자신이 직접 나서지 않은 일이 없었다. 피의 숙청으로 어렵게 왕에 오른 아소카였지만 여전히 마우리아 왕조의 미래는 어두웠다. 영토는 넓어 졌지만 곳곳에서 반란이 계속되었다. 첫번째 목표는 인도 동부 오디샤에 위치하고 있던 칼링가 왕국이었다. 이들은 강력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인도의 해상 무역을 차단하고 있었다. 아소카는 이들을 너무 쉽게 생각해서 소수의 병력으로 칼링가로 쳐들어가 대패하고 나왔다. 아소카는 정복 전쟁을 패배로 시작했다. 3년후 다시 칼링가를 정복하기 위해 무려 70만에 가까운 병사를 동원했다. 마하다니강에 도착할 무렵 아소카는 자신이 들고 있던 칼을 강에 떨어뜨렸다. 이를 보고 불길함을 느낀 병사들이 철군할 것을 요구했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전쟁을 이어갔다. 사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전면에 자신이 올라 칼링가 군과 전면전을 치뤘다. 결국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3년만에 칼링가 제국을 정복 시켰다.


  이 전투로 무려 칼링가 제국의 병사 10만여명이 목숨을 잃었고 15만명의 민간인이 포로로 압송되었다. 칼링가 제국은 마우리아 왕조에 편입되었다. 이전부터 정복전쟁을 이어오던 아소카는 인도 대륙 남부의 카밀 지역을 제외한 전 지역을 정복했다. 인더스 문명이 탄생한 이래로 최대의 영토를 차지했다. 완전한 인도 대륙의 목표도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칼링가 전투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모습을 본 아소카는 회의감에 빠지게 된다. 기원전 260년 아소카 대왕은 불교에 귀의하기로 결정한다. 그의 할아버지인 찬드라쿱타가 자이나교를 신봉했고, 아버지 빈두사라가 힌두교를 믿었던 것과는 상반된 행보를 보이게 된다.



불교 귀의


  아소카는 전쟁에 대한 참회를 위해 정복 전쟁을 멈추고 왕국 곳곳에 불탑과 절을 세우기 시작했다. 또한 공공사업을 위해 동물 병원과 고아원, 양로원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물 학대를 막는 법령을 만들었다. 이는 세계 최초로 동물에 대한 보호 법령이었다. 당시가 기원전 3세기라는 걸 감안한다면 아소카 대왕과 불교 사상은 당시 기준으로 상당히 진보적인 사상이었다. 또한 그는 인도 내에서 불교를 장려했지만, 강요하지 않았다. 다양한 종교가 나온 인더스 문명의 국왕 답게 종교에 대한 자유를 인정했다. 또한, 스리랑카, 셀레우코스 등 주변국에 승려들의 포교 활동을 장려했다. 인도가 세계 종교의 발원지이자 매우 깊은 사상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데에는 아소카 대왕의 노력이 매우 컷다. 

  그는 불교의 법인 다르마를 작성한 비문을 전국 곳곳에 뿌렸다. 이것이 아소카 칙령이다. 그는 이 비문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불교에 귀의 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기원전 269년부터 231년까지 돌기둥과 비석에 칙령을 새겼다. 내용은 상당히 불교적이었다. 자비, 동물 및 생명에 대한 보호, 죄수 보호, 내세 사상, 종교에 대한 믿음이 담겨져있었다. 당시 종교는 대부분 귀족들의 특권이었다. 하지만 아스카의 노력 덕분에 일반인과 지방 사람들에게 까지 불교 사상이 급속도로 퍼지게 된다. 불교 사상에 있어 그는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된다. 불교가 세계적인 종교로 성장하는데 그의 역할이 중요했다. 아소카 칙령은 인도에 그치치 않고, 주변 국들로 퍼져갔다. 근방의 실론, 자바섬은 물론이고 페르시아를 넘어 지중해와 이집트에 까지 불교 사상이 퍼져갔다.

  아소카는 불교 사상을 적극적으로 국가 사업에 반영했다. 아까 언급한 동물 보호를 비롯해 하층민 지원 사업도 이어갔다. 병원을 지어 무상으로 사람들을 치료해주고, 가뭄이 심한 해에는 국고에 있는 곡식을 빌려주기도 했다. 물이 없는 마을에 우물을 설치해 백성들에게 물을 공급해주고, 영토 곳곳에 도로를 만들어 백성들의 교통권을 보장했다. 또한 환경 보호를 위해 마구잡이 식의 경작 활동을 금지 했다. 마우리아의 행정 제도와 관제 또한 불교 식으로 바꿨다. 


  이러한 불교 장려 활동이 모두를 충족시킨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인도 사회의 상류층이자 지배층은 힌두교를 믿는 브라만 계급이었기에 이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다. 아소카를 지지하던 대부분의 세력 여전히 브라만이었기에 이들의 반대는 필연적이었다. 아소카가 죽고 그의 아들 다사라타 마우리아가 즉위하게 되지 이런 불만들이 폭발하기 시작되었다. 아소카는 불교를 장려하기 위해 승려들에게 면세 혜택을 주었고, 아소카 칙령 반포와 불탑 건설에 많은 돈을 쓰며 재정이 악화되었다. 다사라타의 실정까지 겹치게 되자 빛났던 마우리아 왕조에 어둠이 찾아왔다. 이후 암군들의 통치와 주변국들의 성장으로 마우리아 왕조는 기원전 185년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아소카는 인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복 군주로 평가 받는다. 그는 정복 전쟁 뿐만 아니라 불교에도 큰 관심이 있어 인도의 불교 사상을 넘어 전세계의 불교 전파에 큰 힘이 되어준 사람이다. 그의 존재로 지금의 불교 사상이 더욱 발전 할 수 있었다. 통치자가 직접 나서서 불교를 전파한 경우는 아소카 대왕이 역사상 최초이다. 아소카의 늘 자신감이 넘치는 태도는 그를 왕으로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상자들이 발생했지만, 어릴적부터 100여명이 넘는 후계자들 사이에서도 자신이 왕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품고 있었고, 기회가 오자 실행했다. 칼링가 전투에서 수많은 민간인들을 사살했지만, 이는 대부분의 정복 군주들이 가지고 있는 어두운 면이다. 그래도 그는 자신의 잘못을 속죄하기 위해 불교에 귀의했다. 현대적 관점으로 보자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기원전 3세기에 존재했던 그 어떤 통치자보다 진보적인 사상을 지니고 있던 것 많은 분명하다. 그의 행보가 인도의 사상과 세계 종교의 발전을 가져온 것만큼은 확실해 보인다. 어쩌면 아소카 대왕이야 말로 마키아밸리가 쓴 군주론에 가장 적합한 군주가 아닐까 생각된다.